롤스로이스가 9월 15일 팬텀 허밍버드를 공개했다. 팬텀 익스텐디드를 바탕으로 한 단 한 대짜리 프라이빗 커미션으로, 프라이빗 오피스 두바이가 주문을 받아 만들었다. 한 고객이 아내에게 바치려고 의뢰한 차다.

이 차가 기록으로 남는 이유는 재료에 있다. 롤스로이스가 마케트리에 전복 껍데기를 쓴 것은 122년 브랜드 역사에서 처음이다. 마케트리는 얇게 저민 조각을 목재 표면에 끼워 넣어 문양을 만드는 상감 기법을 말한다. 롤스로이스는 그동안 목재와 금속, 자개를 써 왔는데 이번에 전복이 목록에 더해졌다.

벌새 한 마리에 53조각, 식물 문양에 84조각

전복 껍데기의 안쪽 면은 빛의 각도에 따라 푸른빛과 초록빛 사이를 오간다. 진주층이라 불리는 이 면이 이번 작업의 재료다. 문제는 이 재료가 다루기 까다롭다는 데 있다. 두께가 고르지 않고 결이 층으로 쌓여 있어 자르는 방향이 조금만 어긋나도 깨진다.

벌새 한 마리를 완성하는 데 들어간 조각은 53개다. 자개와 전복 껍데기를 섞어 썼다. 뒷좌석 리어 워터폴 패널에 들어간 식물 문양은 84조각으로 짰다. 조각 하나하나를 손으로 자르고 끼워 맞추는 작업이다.

조각을 자르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색을 고르는 일이다. 전복 껍데기는 같은 조개에서 잘라 내도 부위마다 빛깔이 다르다. 벌새의 날개가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처럼 보이려면 조각들의 빛 반사 각도가 이어져야 한다. 53개를 고르는 과정이 사실상 색을 맞추는 과정이었다는 뜻이다.

전복 껍데기 조각 하나를 집어 든 롤스로이스 장인
마케트리 조각 작업 / 사진=롤스로이스

방법을 찾는 데 9개월, 완성에 45시간

롤스로이스 장인들은 이 재료를 어떻게 자르고 앉힐지 알아내는 데 9개월 넘게 매달렸다. 최종안이 나오기까지 여섯 번의 시안을 거쳤다. 방법이 정해진 뒤 실제로 문양을 짜 맞추는 데 걸린 시간은 45시간이다. 준비에 아홉 달, 실행에 이틀 남짓이 든 셈이다.

필 파브르 드 라 그랑주 롤스로이스 비스포크 총괄은 “자연 세계는 늘 롤스로이스 디자인에 영감을 줘 왔고 비범한 형태를 내놓는다”며 “전복 껍데기는 창의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새로운 도전이었다”고 말했다.

주문을 받은 프라이빗 오피스 두바이는 롤스로이스가 최상위 고객만을 위해 세계 몇 곳에 둔 전담 조직이다. 본사가 있는 영국 굿우드까지 오지 않고도 디자이너와 직접 마주 앉아 차를 설계할 수 있게 만든 창구다. 이번처럼 재료부터 새로 정하는 주문은 이 경로로 들어온다.

리어 워터폴 패널에 들어간 식물 문양 마케트리
리어 워터폴 식물 문양 / 사진=롤스로이스

와일드베리와 화이트샌즈, 손으로 그린 벌새

바깥은 두 가지 색으로 나눴다. 아래쪽이 와일드베리, 위쪽이 화이트샌즈다. 차체 옆면을 따라 화이트샌즈 코치라인이 지나가고, 그 끝에 벌새 한 마리를 손으로 그려 넣었다. 코치라인은 붓 한 자루로 차체 전체를 한 번에 긋는 작업이라 롤스로이스 안에서도 소수만 맡는다.

실내는 애시 버 베니어에 실버 버치를 더했고, 가죽은 크렘 라이트를 바탕으로 모카신과 탄을 배색했다. 바닥에는 시셸 카펫을 깔았다. 조개껍데기에서 시작한 주제를 색과 소재로 실내 전체에 퍼뜨린 구성이다.

벌새 마케트리가 들어간 자리는 뒷좌석 승객이 펼쳐 쓰는 피크닉 테이블이다. 평소에는 앞좌석 등받이에 접혀 보이지 않다가 펼칠 때만 드러난다. 가장 공들인 문양을 늘 보이는 곳이 아니라 여는 순간에만 보이는 곳에 넣은 셈이다. 리어 워터폴은 뒷좌석 가운데를 세로로 지나는 패널로, 여기에 84조각짜리 식물 문양이 들어갔다.

차체에 손으로 그려 넣은 벌새와 코치라인
화이트샌즈 코치라인 / 사진=롤스로이스

팬텀 익스텐디드라는 바탕

바탕이 된 팬텀 익스텐디드는 전장 5982mm, 휠베이스 3772mm의 긴 축거 모델이다. 6.75리터 V12를 얹고 공인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킬로미터당 362373g, 복합연비는 100km당 16.017.7리터다. 국내식으로 환산하면 리터당 5.6~6.3km 수준이다.

팬텀 익스텐디드가 이런 주문의 바탕으로 자주 쓰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뒷좌석 공간이 넓어 피크닉 테이블과 리어 워터폴처럼 문양을 넣을 면이 크고, 천장부터 도어 트림까지 손댈 수 있는 자리가 많다. 짧은 축거 모델에서는 같은 문양을 넣어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롤스로이스는 값을 밝히지 않았다. 팬텀 익스텐디드의 기본값만 60만 달러를 넘고, 비스포크 커미션은 주문 내용에 따라 여기서 크게 올라간다. 벌새를 고른 이유에 대해 롤스로이스는 “기쁨과 회복력, 매 순간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능력의 상징”이라고 설명했다.

브랜드가 이런 원오프를 계속 내놓는 것은 취향의 문제만은 아니다. 대량 생산으로는 만들 수 없는 값을 비스포크가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재료 목록에 이름 하나를 더하는 일이 곧 다음 주문의 근거가 된다.